책, 책..그리고, 책... 나는 활자를 사랑한다...
활자로 이루어진 모든 것을 나는 사랑한다.
사랑은 이어져 나의 역사를 타고 흐른다.
내 아이들에게, 그들의 아이들에게도 그 사랑의 유전자는 동일할 것이다.
모든 단위와 척도가 기가(Giga)로, 나노(nano)로 바뀌어도,
장(章)은 여전히 내 손을 거쳐 내 눈으로 들어오는 최소의 단위이다.
한 장(章)에 담긴 언어는
시(詩)와 수필(隨筆)과 소설과 설명문 등의 다양한 옷을 입고
미처 깨닫지 못했던 진리와 사실, 혹은 상상의 세계를 열어보인다.
단어, 또는 문장이 있다.
'Click' 한 번으로
그것이 들어있는, 온세상에 존재하는 문서를 끝없이 열어볼 수 있는 세상...
이렇게 묘한 세계의 중심에서, 나는 아나로그(Analogue)를 외친다.
모든 기기가 디지털(digital)로 태(胎)를 바꾸어도
나의 손가락에 장(章)을 넘길 힘이 있는 한,
나의 눈이 장(章)을 빨아들여
하나의 이야기로 해석해 쌓아갈 수 있는 한,
종이에 박힌 낱낱의 보석을 향한 내 사랑은 숨을 쉴 것이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달리기'- I Remember Running , 달시 웨이크필드 지음.
서른셋에 갑자기 찾아온 운명적 사랑과 아이
그리고 루게릭 병(운동뉴런증후군,근위축성측삭경화증, ALS)
죽음 앞에서 더욱 빛났던 그녀의 마지막 일 년의 기록.
'마음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거든
인내심을 가지고 그 일 때문에 생기는 질문들을 사랑하도록 노력하라.
지금 당장은 답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아라.
질문을 껴안지 않는 한 답은 찾을 수 없다.
지금은 그저 살아가라.
지금은 그저 질문을 껴안으라.'
- p 8, '프롤로그' 중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글을 인용함..
더 이상은 달릴 수 없지만 나는 아직도 달리는 사람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
그 영혼은 이제 더 이상은 달릴 수 없는 나의 몸안에 갇혀 있다.
내 안의 달리는 자의 영혼은 다시 한 번 시원하게 달려
병으로 생긴 스트레스와 달리지 못해 생긴 스트레스를 한 번에 날려버리고 싶어 한다.
내게 닥친 상황이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의 이성은 내가 언젠가 달리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달리는 모습을 지켜 서 볼 수도 없게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주변 구경이라는 새로운 소일거리 속에서 즐거움을 찾고 있다.
달리는 사람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나는 내가 그들이라고 상상해본다.
발에 와 닿는 아스팔트의 감촉이 얼마나 좋을지를 상상해 본다.
허벅지를 감싼 스판덱스 운동복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져오는 듯하다.
나는 스티브에게 달리는 순간, 달리는 느낌 하나하나를 찬찬히 음미하라고 한다.
이제 그는 우리 두 사람을 위해 달리고 있다.
내 인생에서 달리기를 대체할 다른 무언가를 찾으려고도 노력하고 있다.
어느 아주 깊은 밤,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바닷가로 나갔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오직 부두에 정박 중인 요트에 물이 부딪치는 소리뿐이었다.
썰물 때라 백사장은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웠다.
마치 누군가 뛰어보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나는 앞뒤로, 작은 혹은 큰 원을 그리며 한 번 뛰어보았다.
누군가 나를 보았다면 그게 무슨 달리기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내겐 충분했다.
신발을 벗자 스타킹을 신은 발바닥에 차가운 모래가 와 닿았다.
감사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라도 달릴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모든 신경과 근육 하나하나가 이렇듯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달리기라고.
- p 56~ 57, 본문 중에서.
'엄마를 부탁해', 신 경숙 지음.
...그러나 '엄마를 부탁해'를 읽은 우리는
이 조상(성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상) 속의 인물이
1938년 한반도 J시의 진뫼라는 한 산골마을에서 태어나 세살 때 아버지를 잃었으며,
빨치산과 토벌대의 밤낮이 뒤바뀌던 휴전 직후의 혼란기 열일곱의 나이에
십여리 떨어진 이웃마을로 시집갔던 '박 소녀'라는 여인임을 안다.
글을 배울 겨를이 없어 캄캄한 세상을 살았으나
박 소녀 그녀는 누구보다 큰 품으로 남편과 자식들을 챙기고 한 해 여섯 번의 제사를 지내며 부엌을 지켰다.
집 마당은 늘 온갖 생명 가진 것들을 기르고 받아내는 그녀의 노동으로 환했다.
남편의 무심과 출분을 견뎌야 했고, 사산한 어린 생명과 시동생 균의 죽음을 가슴에 묻었다.
늘 자랑이고 기쁨이기만 했던 장남에 대한 미안함 역시 평생 그녀의 가슴을 눌렀다.
비단 장남에게만 그러했으랴만, 실종 후 간간이 전해진 목격담 속에서 그녀의 모습은 한결같았는데,
소처럼 큰 눈에 상처투성이 발등이 다 보이는 파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삼십여년 전 한겨울에 장남의 고등학교 졸업증명서를 들고
아들이 근무하는 서울 용산의 동사무소 숙직실을 찾았던 한밤중 그녀의 모습이 그렇지 않았던가.
자식들이 솔가하고 난 노년의 허허로움 속에서고아원 아이들을 돌보고,
고아원에 갈 때면 그곳의 젊은 여인에게 소설가인 큰딸 '너'의 책을 읽어달라고 했다던 그녀.
그러니까 한반도 진뫼라는 산골에서 태어나 여사여사한 내력의 삶을 살아온 '너'의 엄마이자,
조선땅 어디에서나 만나는 우리의 엄마, 그리고 어마라는 보편적인 삶 그 자체.
어머니라는 자리. 여기에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 p 291~292, 문학평론가 정 홍수, 해설 '피에타, 그 영원한 귀환' 중에서.
엄마가 파란 슬리퍼에 움푹 파인 내 발등을 들여다보네.
내 발등은 푹 파인 상처 속으로 뼈가 드러나 보이네.
엄마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지네.
저 얼굴은내가 죽은 아이를 낳았을 때 장롱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네.
내 새끼. 엄마가 양팔을 벌리네.
엄마가 방금 죽은 아이를 품에 안듯이 나의 겨드랑이에 팔을 집어넣네.
내 발에서 파란 슬리퍼를 벗기고 나의 두발을 엄마의 무릎으로 끌어올리네.
엄마는 웃지않네.울지도 않네.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
- p 254 본문 중에서..
현재진행형인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