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Persona grata..

'하산한 산소년'...소백의 정서로 영시를 낳다..김 연복 선생님.

슈퍼맘빅토리아 2009. 3. 26. 01:25

 

 

 

저자의 후기

 

시인 마운틴 보이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사람들
Mountain Boy’s Best Readers Remembered

 

 

 

필자의 첫 영시집의 이름이 Mountain Boy(1977)인 데다 시 속의 투박한 시골 정경과 그 향기 때문인지 어느새 해외 독자들은 필자를 Mountain Boy로 불렀다.
필자는 1960년대 후반 고향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면서 그림에 심취하여 교직을 그만두고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외국 유학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국제어인 영어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에는 초등학교에 영어 과목이 없었고 따라서 사범학교에서도 영어를 배우지 않았으므로 필자의 영어 독학은 실은 먼 지난날 중학교 영어 시간의 회고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교직에 있으면서 20대 후반에 시작한 영어 독학은 실로 가장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웠던 점은 뭐니 뭐니 해도 단어 외우기를 통한 어휘 확충이었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영어 편지 쓰기와 영어 단문 만들기 훈련이었다. 문장을 만들어 본 단어는 잘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71년 한국전 이후의 절대 가난 속에서 필자의 고등 교육을 위해 온몸을 다 바치셨던 부친이 타계하셨다. 필자는 그때야 비로소 본인의 예술적 성취욕에만 급급하여 부모를 잘 모시지 못했다는 한없는 자괴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친에 대한 뉘우침과 그리움을 주제로 한 내용을 한글과 영문으로 구성하여 출판한 것이 곧 첫 한·영 시집 Mountain Boy가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영시를 배우기 위해 당시 계명대학에 풀브라이트 교환교수로 와 있던 미국의 소설가, 시인, 평론가인 댄 레빈 교수를 찾았다. 레빈 교수는 필자에게 영어 시인이 되려면 미국이나 영국, 캐나다나 호주 등 영어 상용 국가에 가서 약 20년은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부양가족이 있는 필자로서는 도저히 수용 불가능한 제안이라서 레빈 교수 자신에게 가르침을 부탁하였으나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허탈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필자는 레빈 교수에게 영문 시 편지 한 편을 다시 보냈다. 시의 제목이 바로 ‘울타리 밖의 야생초는 누가 키우는가?’이었다. 필자는 그가 맡은 학생이 아니니 그에게는 바로 울타리 밖의 야생초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시는 생각보다 엄청나게 큰 힘을 내재하고 있었다.
그 시의 마지막 행은
“… 울타리 밖의 야생초는 하나님이 키우시니
 님께서 하나님의 손이 되어 주소서!”
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이 두 줄의 시구가 필자의 전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 두 줄 시구의 열정적인 호소는 레빈 교수의 마음을 매료시켰을 뿐만 아니라 필자에게서 시인의 가능성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바다를 건너왔더라도 사전 약속이 없으면 잘 만나 주지 않는 현대 서구인들인데 레빈 교수는 흔쾌히 수락했을 뿐만 아니라 영시 신작이 나오면 시간 제한 없이 언제라도 자기 아파트로 오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현대 영시 작법을 사사 받았고 그의 소개로 필자의 작품이 미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글 시도 그러하겠지만 영시의 끝없는 매력은 가히 쉽게 감지할 수 없는 깊이의 내재된 형이상학적 사유의 심연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높은 지성의 독자들이 그냥 지나치지 못할 멋과 맛과 힘이 있어야 하는 바 그 모든 것을 필자는 투박한 시골 삶의 진솔한 투영과 형상화에서 찾았는데 의외로 이 방법이 적중했는지 그동안 해외의 몇몇 독자들로부터 참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세계의 시인이 되겠다는 어린 날의 꿈을 얼마간은 이루긴 했지만 그 창작 과정 또한 그리 녹록치는 않았고 외국어로 시를 쓰다 보니 무엇보다 생활 주변의 사람들로부터는 정서적으로 격리된 삶을 살아야 했다. 마치 높이로만 자란 미루나무가 멀리 산 너머 친구들과의 신호 교류에만 열중하다 보니 바로 밑둥치의 친구들과는 소외된 삶을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필자로서는 필자의 시를 무척이나 사랑해 왔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자위하고 싶다.

 

 

⊙ 댄 레빈 교수
 Professor Dan Levin

 
필자의 스승인 댄 레빈 교수. 1982년 계명대학 풀브라이트 교환교수로 재직 시 필자에게 현대 영시 작법을 지도해 주었으며 지금도 미국 롱아일랜드 대학에서 시 창작을 가르치고 있다. 특히 그는 필자의 시 ‘산 소년 산을 떠나다’ 속 “오늘 밤도 은비늘 밀리며 떠오르는 시의 대륙”이란 행에서 “시의 대륙”이란 이미지가 현대 시인들 중 그 누구도 착안하지 못한 표현이라며 극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그는 지금까지 30여 년 간 필자의 최고의 독자요 스승으로서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 월리암 패히 교수
 Poet, Editor, Professor William A. Fahey

 
시인이며 레빈 교수의 친구로 함께 롱아일랜드 문예 창작 교수로 재직하면서 휘트먼 출생지 협회 문예지 웨스트 힐즈 리뷰지의 편집장을 지냈다. 1984년 레빈 교수가 그에게 보낸 필자의 영문시집 ‘흙의 소리, Voices from the Soil’를 읽고 무척이나 감동한 나머지 미국 문인들만 투고하는 웨스트 힐즈 리뷰지에 필자를 위해 외국 시인 특별 초대 난을 신설해서 필자의 시 3편을 게재하였으며 특히 그 책 속 100여 편의 미국 현지 시인들의 작품 중 필자의 ‘하산한 산 소년, Mountain Boy in the Lowlands’외 5편을 예선으로 뽑아서 최종 심사자인 당시 휘트먼 시협 거주 시인 갈웨이 키넬 시인에게 넘겨 필자에게 영광의 제1회 휘트먼 시협상을 받게 해 주었다. 그는 그 후로도 한 번도 만난 적도 없는 외국 시인인 필자에게 엄청난 애정을 쏟아 주었으며 필자의 시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 필립 엘리오트 시인
 Poet Philip Elliott

 
지금 상주 시내 모 중학교에서 영어회화 강사로 있는 필립 엘리오트 시인은 자신은 시인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며 겸손해 한다. 그러나 비록 그가 대학의 문학부가 아닌 공과대학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문학적 감각과 분석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필자의 창작 영시 초고와 영역 시들의 훌륭한 조언자로 필자에게 큰 도움을 주어 왔다. 그는 2005년 2월 어느 날 새벽 2시에 필자의 집 바로 앞 마트에서 일어난 큰 화재를 자기가 근무하며 거주하던 학원의 건물 6층에서 제일 먼저 목격하고 잠든 마을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하여 말도 안 통하는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 사람들을 깨운 의인으로 필자도 그때 그를 만났다.
그런 그가 필자의 고향 상주에서 한 십 년간은 살고 싶다고 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필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으니 이 또한 시인으로서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리고 국내에서 필자의 영시를 영시 그대로 감상해 주신 분은 고려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치셨던 김종길 교수이며 필자의 창작 영문 시집을 보고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영시작가라며 격려해 주었다. 김교수께서는 필자의 첫 영시집(산 소년, Mountain Boy, 1977) 시절부터 조언을 해 준 분이다.


원로 연예인 최불암 씨는 필자의 5시집(다시 산 소년, Mountain Boy Again, 2002) 속의 대화체 시들을 읽고 “그 시나리오가 무척 아름다워 ‘배우도 시를 먹고 산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술회하며 격려해 주었다.
그 외에도 필자의 시를 무척이나 사랑한 수많은 국내 독자들을 기억하며 그분들의 따뜻한 사랑과 격려가 없었다면 시인 마운틴 보이는 오늘도 어둠에 묻힌 한 알의 자갈돌로 남아 있으리라 생각하니 더욱 올곧은 작품으로 보답하고자 가슴을 여며 본다.
또한 필자에게 항상 예쁘게 시집을 꾸며 준 그루출판사 이은재 사장에게도 감사 드린다.


2008년 3월
상주시 남성동 관수헌에서
저자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