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앞날을 준비하다...
<< 돌을 앞두고 찍은 사진. .>>
1993년이다..
이토록 복슬복슬하고 통실한 아들은 우리 가정의 첫 열매이다.
깜장구슬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카메라를 쳐다보는 아이의 어느 한 구석에서도
'자폐증'(Autism,오티즘)의 흔적이나 단서를 찾아 볼 수 없었다.
그저 낯을 거의 가리지 않는 착하고 순한 아기였을 뿐..
<< 상윤이의 미니 부엌 >>
상윤이 가장 즐겨하던 놀이다..
유난히 부엌살림에 관심이 많아 싱크대 아랫칸을 아들에게 통째로 내어주고 살았던 시절..
아들에게 미니 부엌을 꾸며주었다.
당시로선 제법 투자를 해서 '리틀 타익스'의 식탁 달린 싱크대와 조리대,
그리고 온갖 과일 채소 모형과 예쁘고 자그마한 그릇들..
전용 행주까지 정해 주었고...아들은 틈만 나면 이곳에 들러붙어 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그러나 그것은 엄마놀이도 아니고, 동생이나 친구와 하는 소꿉장난도 아니고...
오로지 혼자만의 세계에서 즐기는 부엌놀이였다..
나를 포함해서 누군가가 개입하려고 들면 사정없이 쫓겨났다.
울고, 소리를 지르고...
하는 수 없이 옆에서 일방적으로 책을 읽어주다가, 말을 시키다가...
나는 원맨쇼의 달인이 되어갔다..
딸아이가 자라면서 끼어들려다가 오빠에게 떠밀려 뒤로 넘어진 것이 부지기수..
생존의 법칙을 깨달은 딸은 오빠가 낮잠을 자는 두 시간 동안만 이곳을 차지할 수 밖에 없었다.
신나게 부엌놀이를 하는 아들의 곁에서 딸과 나는 앉은뱅이 부엌을 하나 더 만들어 평행놀이를 했다..
** 평행놀이(parallel play) : 각자 옆에서 독립적으로 놀음.
함께가 아니라 따로따로 놀음,
놀이방법과 도구는 동일하지만 다른 아이들의 옆에서 노는 상태.
2~3세에 많이 관찰됨.
<< 의자 위에 올라 서서 스프 가루를 볶고 있는 아들..>>
부엌놀이에 몰두해 있는 아들에게 진짜 부엌을 체험시켜주기로 계획한 나는
어린이가 할 수 있는 요리활동에 대해 몇 권의 책을 뒤적여 참고해 보고
'요리로 배우는 과학'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세우고 딸아이와 함께 상윤이를 요리에 참여시키기로 했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일상이 과학과 철학을 관통하고 있지 않은가..ㅎㅎ
그냥 물을 끓이면서도 '물은 100도 c에서 끓는다', 얼음은 0도에서 언다..
기름은 대개 물보다 끓는 온도가 더 높다..물은 액체다...등등
내가 아는 상식 선에서 아이들이 알아듣거나 못 알아듣거나 조잘조잘 쉼없이 이야기를 건넸다.
사진에서 처럼 아이들이 좋아하는 스프를 끓이는 일도 즐거운 요리활동이 되었다.
일단 프라이 팬이 달궈진 다음 불을 끄고,
스프 가루(시중에서 파는 오X기 표..roux를 만드는 것은 아이들의 요리에는 너무 번거롭다)를 넣어
노르스름해질 때까지 볶아 우유를 붓고 계속 저으며 은근한 불에 끓이는 것..
두 아이에게 각자의 도마를 주고 두어 개의 양송이를 씻어서 케익 자르는 플라스틱 칼로 잘라
스프가 끓으면 넣게 한다.
비록 간단한 요리지만, 아이들에게 '요리'를 한다는 뿌듯함과
자신들이 완성하여 맛난 요리를 먹을 때의 성취감을 맛 볼 수 있는 너무 좋은 기회였다.
라면이나 국수를 삶을 때에도 물이 끓으면 일단 불을 끄고 의자에 올라가 면을 집어 넣는 것은 두 아이들 차지였다.
돌이켜 보면 아들이 요리할 때와 노래 부를 때엔 집중을 잘 하고 떼를 부리지 않은 것 같다.
상을 차리거나 냉장고에서 요리재료를 꺼내오는 일 또한 아이들이 담당했다.
조리할 메뉴를 알려 주고 필요한 재료를 찾아오게 하는 것, 또한 우리들이 매우 즐기던 놀이..
두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시장에 가서 야채를 고르고, 와서 다듬고 지지고 볶고...
부모님과 합가하기 전이라 지금처럼 많은 양의 음식을 하진 않았어도, 참 여러 가지를 다양하게 해먹었던 것 같다..
아이들에게 인스턴트 음식을 되도록 적게 먹이고, 삼백(三白)식품- 백설탕, 흰밀가루, 흰 밥-을 피했다.
예전에 할머니들이 말씀하셨듯이 '먹어본 넘이 잘 먹는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닿는다.
상윤이는 지금도 한 번 먹어본 음식은 거의 기억을 한다.
꼬부랑 말로 된 어려운 음식이름이나 조리법들도 척척 외운다.
그렇게 상윤이와 서원이는 부엌을 놀이방 삼아 잔뻐가 굵었다..ㅎㅎ
가끔씩 딸아이는
엄마가 자기들을 '어린이 노예'로 키웠다는 둥, 자기들은 우리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다는 둥,
모친께옵서 '아동의 노동력 착취'를 했다는 둥하며 농담을 하지만
그리 나쁜 기억은 아닌 듯한 느낌이다.
하긴...
깍지콩 나는 철이면 한 박스씩 사다가 아이들 둘이 앉아 까곤 했으니...
덕분에 둘의 손끝은 남달리 야물다.
사람들이 내게 '아이들을 어릴 때부터 참 잘 가르치셨어요'라고 말할 때..
솔직히 속으로는 부끄러웠다..
지금 같으면 더 잘 가르칠 수 있었을텐데 그다지 잘 가르치지 못 했다고
후회스런 부분이 하도 많아서..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어느 아이들보다 집안일을 잘 한다.
그리고 누구보다 집안일에 아이들을 많이 동참시켰다.
또한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다.
그들이 시집장가 가면 그 빛을 발할 거라고..ㅎㅎ
<<구립어린이집에 다닐 때..친구들과 고구마 캐러가서 찍은 사진..5살무렵이다.>>
중학교 2학년..할아버지의 오후 간식으로 절편을 굽고 있는 아들..
예나 지금이나 굽는 것에는 남다른 재주가 있다.
커피 믹스로 커피 한 잔 타서 노릇노릇 구운 떡과 함께 차려 드린다.
아들의 믹스커피 타는 솜씨는 유명하다.
한 번 가르쳐줬더니 물의 양을 기억했다가 한결 같은 맛으로 타온다.
지친 오후..아들이 '커피 한 잔 타드릴까요?' 물어올 때..
혹은, 어미의 온몸 세포가 커피를 간절히 바람을 안테나로 인식한 아들이
달콤한 한 잔의 믹스 커피를 말없이 타다 줄 때..
어깨에 내려 앉은 십칠 년 묵은 시커먼 피로의 그림자가 스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느낀다.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시는 아버님>>
아들이 차린 저녁상이다...중 2 겨울..
항상 세심하게 ...
중 1 때..아들의 첫 작품이다..
'짜빠게티'를 이용한 즉석짜장 만들기..
아들이 직접 차린 식탁..
상윤이가 너무 좋아하는, 집에서 쑨 도토리 묵을 굳이 함께 먹어야 한단다..^^*
파프리카 썰기..
초등학교 3 학년 즈음부터 과일을 손수 깎아먹게 했다.
톱니 있는 칼이 비교적 덜 위험해서 사과 깎는 것 부터 연습시켰는데,
처음에는 거의 뜯다시피 했지만, 차차 얇게 껍질을 벗길 수 있었다.
요즘은 시키지 않아도 과일을 잘 차려나온다..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물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잡는 법을 가르쳐 주라'고..
하도 들어 식상한 조언이긴 하지만, 아들과 내 인생에 있어 아주 중요한 지표가 되는 말씀이다.
처음엔 물고기가 아들을 잡아 먹을까 봐 감히 잡는 법을 가르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아들보다 하루 늦게 죽기만을 마냥 바랄 수는 없지 않은가..
'남들이 고래를 잡으면 우리는 멸치라도 잡자'..하는 마음으로
아주 조그만 걸음부터 옮기기 시작해서
수없이 엎어지고, 깨지고, 코피 터져 가며 걸어가는 길이다..
상윤이와 나는 이제 세 달째 요리학원에 다니고 있다..
횟수로는 딱 열 세번의 수업을 들었다.
기말고사와 방학으로 인해 빠진 적이 여러 번 있어, 개학한 후론 하루도 빠지지 않고
토요일까지 틈나는 대로 요리를 배운다.
학원에 가서 수업준비를 하고 요리를 완성할 때까지
꼬박 세 시간이 걸리는 것이 기본이다.
가끔 복잡한 요리가 메뉴로 올라올 때는 세 시간 반을 서있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아들은 사뭇 진지하다...
'힘들지 않아요', '잘 할게요','재미있어요'를 입에 달고 산다.
사진을 올리고 보면 행간의 힘듦과 버벅거림은 보이지 않고
아주 그럴싸한 요리사처럼 보인다..ㅎㅎ
그러나 아직은 그림처럼 훌륭하거나 혼자서 척척 해내진 못 한다..
(사이사이 어미의 버둥거림이 양념으로 듬뿍 들어가 있다..ㅎㅎ)
다만 그의 자부심과 노력과 진지함이 너무나 소중해서...
힘들고 지치고, 때로는 꾀도 나지만
오늘도 우리 모자는 요리학원으로 향한다.
이제 그리 멀지만은 않은 미래를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