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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겸재 정선 특별전

슈퍼맘빅토리아 2009. 10. 7. 18:16

올해는 조선 후기의 대화가 겸재 정선 서거 25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이를 맞이하여 테마전 "겸재 정선, 붓으로 펼친 천지조화"를 개최합니다. 겸재 정선(1676-1759)은 우리나라 회화사에 새로운 전통을 세운 거장입니다. 조선후기에는 조선 고유의 소재와 화풍을 보여주는 그림들이 활발하게 그려지는데, 그 시작이 바로 겸재 정선입니다.

그는 서울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 84세까지 장수하였습니다. 36세부터 82세에 이르는 제작연대가 있는 작품이 보여주듯 일평생 붓을 놓지 않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벗 조영석은 정선이 금강산 등 전국을 두루 여행하고 사생하였으며, 사용한 붓을 묻으면 무덤을 이룰 정도라고 하였습니다. 중국 남종화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사생을 통해 새롭게 발전시킨 진경산수화는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성공적으로 묘사한 우리의 자랑입니다.

이번 전시에는 그의 작품을 진경산수화와 관념산수화, 고사인물화, 문학적 소재를 그린 그림으로 나누어 조명해 보았습니다. 또한 이러한 창작이 가능했던 지역적 배경, 교유관계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개최하는 작은 전시이지만 그의 위대한 예술 세계를 느끼며 그가 살던 시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글자료 : 국립중앙박물관)

*뱀꼬리 : 다만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정선의 대표작인 '금강전도'와 인왕제색도가 전시물에서 빠진 것입니다.

 

해인사도

해인사는 경남 합천에 위치한 사찰이다. 정선은 금강산과 한양 지역 외에 경상도 지역의 진경산수화를 많이 남겼는데, 이는 10년 간의 영남지역 지방관을 지낸 그의 이력과 관련이 있다. 선면에 가야산에 위치한 해인사의 전경을 그렸는데, 주변의 산을 모두 미점을 써서 표현하였다. 색색으로 물든 단품은 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낙산사도

낙산사는 강원도 양양에 위치한 사찰로 관동팔결 중 하나로 꼽히는 곳이다. 선면에 그려진 이 그림은 낙산산에서 바라본 동해의 일출 장관을 그린 것이다. 화면의 반을 차지하는 동해의 일렁이는 물결은 화면 밖에서 그림을 보고 있는 사람마저 바다로 끌러들인다. 색 없이 거의 수묵으로 그렸는데, 저 멀리 떠오르는 해만은 붉은 색으로 그렸다.

 

내연삼용추도

내연산은 경상북도 청하에 있는 명산으로 12개의 폭포가 있다. 이 중 제5,6,7폭인 상중하 삼용추의 폭포가 특히 아름다워 이를 내연산삼용추라 한다. 정선은 58세 되던 1733년부터 1735년까지 지금의 포항시에 속하는 청하의 현감으로 지내며 청하의 절경은 물론이고 주위의 명소를 사생하였다. 절벽의 바위결을 수직준으로 그어 시원하게 묘사하고 삼용추의 폭포 길이를 급격하게 줄여가며 세찬 흐름을 표현했다.

 

정양사도

정양사는 고려 태조가 금강산의 주인인 담무갈 곧 법기보살을 친견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창건한 절이다. 금강내산의 암봉들이 멀찍이 물러나 있고 정양사를 싸고 있는 토산이 위의 암봉들을 받쳐주고 있는 형국이다. 비로봉 아래로 금강대가 이어지고 천일대 위에서는 선비들이 금강산의 장관을 즐기고 있다.

 

비로봉도

비로봉은 해발 1638m인 금강산의 주봉이며, 이 봉우리를 정점으로 내금강과 외금강으로 나뉜다. 비로봉이 뭉게구름처럼 하늘로 오르고 아래쪽에 위치한 중향성의 암봉들은 비로봉의 기세를 받쳐 주는 듯 도열하였다. 비로봉은 피마준으로 부드럽게, 중향성 암봉들은 수직준을 구사하여 칼날같이 날카롭게 하여 매우 대조적이다. 수묵의 필획만으로 산천의 대비적 속성과 음양의 원리를 미학적으로 구현하여 금강산이 이루는 장관의 정수를 표현한 걸작이다.

 

금강산내산총도

마치 하늘에서 새가 되어 금강내산을 내려다 보며 그린 듯 부감하여 그린 그림이다. 이런 전도식의 표현을 정선에 와서 창안된 것이라가 보다는 조선 초 이래로 계속된 보수적인 산수화의 전통과 닿아 있다.

 

피금정도

한양에서 금강산을 가기 위해서는 김화에서 금성을 거쳐 단발령을 넘어야 한다. 금성을 지나며 남대천을 따라 나 있는 대로변에서 피금정과 마주치게 되는데, :옷깃을 풀어 젖히는 정자"라는 뜻에 맞게 여유를 느끼게 하는 경치이다.

 

단발령망금강산도

단발령 고개에서 처음 금강산을 대면하는 장면이다. 이곳에 오르는 사람마다 금강산의 풍모를 바라보면 머리를 깎고 속세를 떠나고 싶어진다는 데서 단발령이란 지명이 유래하였다.

 

장안사도

장안사는 내금강 초입에 위치한 사찰로, 금강산을 멀리서 조망하다가 산 속으로 접어들었을 때의 현장감이 화면에 담겨 있다. 무지개다리 모양의 만천교와 왼쪽의 석가봉, 관음봉, 지장봉의 백색 암봉들이 유독 크게 그려졌다.

 

보덕굴도

표훈사에서 금강대와 만폭동을 거슬러 올라가면 벽하담이 흐르고 그 오른쪽 높은 언덕에 보덕굴이 있다. 왼쪽으로는 대소 향로봉이 위치하여 보덕굴과 병립을 이룬다.

 

불정대도

내금강에서 외금강으로 넘어가려면 안문재를 넘어야 한다. 이 고개를 넘어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외나무 다리를 건너야 불정대에 오를 수 있다. 건너편 외금금에 십이폭이 흐르고 뾰족한 암봉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백천교도

조선시대에 금강산 탐승객들은 대체로 장안사 만천교를 통해 내금강으로 들어와 백천교를 통해 외금강으로 나가는 노정을 택하였다. 오른쪽에 내금강 여정 때 타고 다녔을 남여 네 채와 이를 매고 다녔을 승려들이 보이고 건너편 외금강 쪽으로는 말 4필이 대기하고 있다.

 

해산정도

외금강을 벗어나 동해안에 위치한 고성의 해산정 모습이다. 금강산 백색 암봉을 원경에 두고 오른쪽에는 적벽과 남강, 대호정, 근경의 동해에는 북두칠성의 배열을 한 칠성봉을 그렸다.

 

사선정도

사선정은 고성 삼일호에 있는 정자이다. 삼일호 안에 있는 섬이 사선도인데, 신라 때의 화랑인 영랑, 술랑, 안상, 남석행이 이곳에 왔다가 이 경치에 흘려 3일 동안 돌아가는 것도 잊고 놀았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문암관 일출도

앞의 사선정도에서 오른쪽 위에 작게 그려졌던 문암의 모습을 확대하여 그린 것이다. 오른쪽 아래에 사선정의 모습도 작게 등장한다. 돌로 만든 문처럼 생겼다하여 문암이라 하는데, 두 개의 돌이 깍여 자른 듯 서있고 그 위에 너럭바위가 덮여 있다.

 

옹천도

문암에서 해변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옹천 즉 독벼랑이라 불리는 둥그런 형태의 벼랑이 나온다. 파도가 계속 넘실거리고 말이 쌍으로 다니지 못할 정도로 좁고 험준한 절벽이다. 중턱으로 난 길에 점을 게속 직어 행로는 나타낸 점이 재미있다.

 

총석정도

통천의 총석정이다. 바다로 향한 절벽 위에 총석정이 서 있고, 그 옆으로 네개의 돌기둥인 사선봉이 있다. 총석정 건너 절벽에 환선정, 멀리 동해에는 묘도와 천도가 그려졌다.

 

시주대도

흡곡은 관동에서도 제일 북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이곳에 시중호가 있으며, 그 안에 칠보도, 화학대가 있고 멀리 동해에 작은 섬들이 늘어서 있다. 초기작 답게 경관을 충실하게 묘사하려는 의욕이 느껴진다.

 

 

서교전의도

정선의 이웃이자 친구인 이춘제가 청나라로 가는 사신단의 부사가 되어 중국으로 떠나는 광경을 그린 것이다. 무악산과 인왕산 사이로 난 무악재 길을 접어드는 일행이 보인다.

 

서정보월도

글씨가 일부 탈락되었으나 "늦은 봄"에 그렸음을 밝히고 있다. 제목이 써 있어서 달빛을 밟는 모습을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달은 보이지 않는다. 인왕산 서쪽 자락으로 보이는 바위산이 있고, 그 옆으로 한양 성곽이 이어져 있다.

 

삼승조망도

정선의 나이 65세 되던 해, 인왕산 기슭에 위치한 대저택의 주인인 이춘제가 후원의 정자인 삼승정에 앉아 멀리 한양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다. 화면의 주요 건축물과 산 옆에는 지명을 써 넣었다. 근경에서부터의 공간감과 거리감이 능숙한 필묵법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창의문도

사소문의 하나인 창의문은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에 있는 북서문이다. 인조반정 당시 창의군이 이 문으로 들어와 반정에 성공하였다. 창의문까지 오르는 계곡을 부드러운 필치의 미점과 피마준으로 그려 인왕산의 북쪽 끝 봉우리인 벽련봉의 강한 묵찰법과 대조를 이룬다.

 

백운동도

백운동은 인왕산 자락이 백악산과 마주치는 인왕산 동편 북쪽 끝자락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곳은 계곡이 깊고 바위 절벽이 아름다워 도성의 명승지로 이름이 높았다.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 윤씨의 형부 이염의가 대저택을 짓고 호사를 누리며 살았다고 한다.

  

산수도

화면 왼쪽 위에 "팔십이세옹" 겸재라고 써있어서 정선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말년작이 된다. 원경에 백악산이 있고 그 뒤로 북한산의 봉우리들이 보이는데 중앙에 있는 건물을 성수침의 서재인 "청송당"으로 보기도 한다.

 

청풍계도

그림 상부에 글이 있어 정선이 64세 되던 해인 1739년에 그렸음을 알 수 있다. 화면의 정 중앙에 우의정 김상용의 초상을 봉안한 건물 늠연사가 위치하였다. 전경의 버드나무에서 시작하여 전나무, 소나무로 이어지는 힘찬 기세와 이를 받아 상승하는 육중한 묵찰법의 절벽 표현이 화면 전체에 에너지를 뿜는다. 아래에서부터 나무 사이로 김상용의 거처인 청풍지각, 띠 지붕의 태고정, 그 위로 늠연사가 보인다.

 

강상인물도

언덕에 앉아 강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을 그렸다. 정선 그림에서 자연과 인간은 사이좋게 조화를 이룬다. 필선은 매우 부드럽고 편안안 느낌을 준다.

 

강천모설도

동양 회화의 전통적인 소재인 소상팔경도 중 한 폭인 강천모설을 그린 것이다. 소상팔경은 중국 호남성 동정호의 남쪽 소수와 상수가 합쳐지는 곳의 여덟 경치를 그린 것이다. 정선은 우리 산천을 독창적인 화풍으로 그린 진경산수화 뿐 아니라 이와 같이 전통적인 소재와 화풍을 보여주는 작품도 많이 제작하였다. 법고창신, 즉 엣 것을 배우고 새 것을 창조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행선도

물결이 일랑이는 바다 한 가운데에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는 모습을 그렸다. 넘실거리는 물결 표현은 정선의 진경산수화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바다 물결은 호방하게 그리고 배와 사람의 모습은 비교적 꼼꼼하게 그려 대비를 준다.

 

파교설후도(눈 내린 후 파교를 건너며)

나귀를 타고 가는 인물은 추운 눈 내린 겨울날 파교라는 다리를 건너고 있다. 파교는 중국의 시인 맹호연이 매화를 찾아 건넜다는 섬서성에 위치한 다리이기도 하며, 중국 당대 정게선의 "눈 내리는 파교 위에서 나귀를 타고 시상에 잠기도다"는 시구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보통 '파교'를 건너다는 행위는 매화를 찾아 떠나는 것으로 비유되는 즉 선비들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가치를 추구하고자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북원수회도첩(삼백젼 전 서울 장의동에서 열린 어르신들의 잔치)

정선은 백악산 자락 유란동에서 태어나 성장하였고, 만년에는 인왕산 기슭 인왕곡으로 옮겨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 당시 이 지역에는 유서깊은 가문들이 모여 살면서 조선의 학문과 문화를 이끄는 중심 역할을 하였다. 정선은 이 지역의 문인들과 시서화로 교유하였고, 이들의 지원을 받으려 화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북원수회도첩]은 정선이 41세 때인 1716년에 그린 것으로 장위동에서 열린 70세 이상 노인들의 모임을 기념하기 위한 화첩이다. 손님들은 모두 백악산과 인왕산 인근에 살며 학연과 교유을 이어온 동네사람들로 모임을 주도한 박견성이 정선의 외숙이기 때문에 정선이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듯하다. 18세기 초 백악산, 인왕산 부근 사람들의 면면과 그 관계, 그들이 쓴 시와 글씨까지 살펴볼 수 있는 당시의 선도 문화를 집약한 중요한 문화 보고서이다. 

출처 : 山寺愛人
글쓴이 : 山寺愛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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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스크랩을 그리 즐기지 않는 사람이다.

꼭 필요한 자료를 가져와  삭히고 소화시킨 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내가 스크랩을 하는 주목적이었다.

하지만 겸재 정선에 대해 알고 싶어서 검색을 하던 도중 매우 소중한 자료들을 발견하게 되었기에

원글 그대로 스크랩해서 붙인다..

나처럼 겸재 선생에 대해 몹시 알고 싶어하는 분이 또 있을 지 몰라서..ㅎ

글을 쓰신 山寺愛人님께 충실한 감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