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를 위하여..For Victoria...

눈먼 자들의 도시...빛을 향해 달리다..

슈퍼맘빅토리아 2010. 2. 6. 01:45

 

삶의 두루마리를 펼쳐 놓고 보자면

티끌 하나에 지나지 않을 작은 목표에 도달했다.

더구나 따지고 보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나의 것도 아닐 터인데

잠시의 성취감의 꼬리를 물고

이리 무기력한 시간이 따라올 줄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핑게일 게다.

이참에 휘뚜루마뚜루 하고 싶은 대로 심신을 내맡기고 싶었던 걸 지도 모른다.

육신은 의지를 배척하고, 충동은 스스로의 판단을 흐려놓았으나,

무력감은 충동도, 의지도, 억센 척 버텨오던 건강도 삼켰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옛말이 틀린 게 없었던가.

'모든 병의 근원은 마음 속에 있다'는 보편타당한 진리 또한 내게 어김없이 적용되던 것이었던가.

무기력한 가운데 보냈던 조용한 시간들이 오히려 약이 되었다.

그동안 앞만 보고 쉼없이 달려왔던 것이 결코 최선책은 아니었으리라.

 

진눈깨비로 한 치 앞 분간이 힘들었던 어느 날...

딸아이를 태우고 강변북로를 달리던 그 아침...

고가도로를 올라가며 펼쳐진 시야...

불현듯 '눈먼 자들의 도시'가 떠올랐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영화의 포스터를 가득 채운, 

위를 향해 쳐다보던 '줄리언 무어'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이것이 아니었을까..하는 느낌..

 

음악을 끄고...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딸아이를 흘깃 넘겨다 보고...

목적지로 향하는 조심스런 길 내내 깊은 묵상에 잠겼다.

 

 

 

 

아들과 더불어 헤쳐나온 외로운 걸음, 걸음 마다

내가 전적으로 의지하고 조언을 받고, 따를 수 있는 원칙이나 지도자는 없었다.

병원도, 치료사도, 전문서적도 명확한 길의 과정과 결과를 제시해 주지 않았고

수많은 가설들이 정확한 데이터 없이 서로 충돌하는 가운데

판단하는 몫은 온전히 부모의 것..

깜빡거리며 앞서가는 등불이라도 있었다면 흔적을 좇아갈 수도 있었으련만

그조차 없는 상황에서 동시대의 수많은 자폐자녀의 어머니들처럼

오로지 자신의 본능에 의지하여  아이를 키울 수 밖에 없었다.

 

장애를 가진 자녀들의 학령기가 끝나는 시점이 부모들에게 엄청나게 힘든 시기라는 이야기는 이미 누누히 듣고 있던 터였다.

오죽하면 고등학교 졸업식날, 많은 부모들이 돌아가지도 않고

교실에서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며 안타까워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을까..

 

아들의 스무 살이 하루하루 눈 앞으로 다가올 수록 급한 마음은 한 걸음 더 빨리 앞서간다.

그간의 불확실함은 미래에 겪을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물론,  나름대로 준비하고 대비하고, 예비한 과정들이 있었지만

막상 현실로 닥쳐오니 자신감은 손가락 사이의 모래처럼 빠져내린다.

 

아들이 35 개월 되었을 때..

처음으로 소아정신과란 곳에 가서 발달검사를 한 후 나온 결과를 보고..

'아마도 이만큼 아팠겠구나'.. 싶다.

다만, 당시에는 지금처럼 몸져 눕지도 못 할 상황이어서 아픈 몸을 질질 끌고 신열에 들뜬 상태로

아이의 교육기관을 알아보고,  새로운 검사기관을 찾아다닐 수 밖에 없었다.

돌이켜 보면.. 나 태어나 넘겨온 햇수보다 더 긴 듯한 시간..

'그것도 지나왔는데 지금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 ..수없이 되뇌며 추스리려 했지만,

그동안 너무 지쳤나 보다..

무력감 속을 유영하며 멍하니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다.

 

 

 

 

    

 

 

앞서 가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진다..

...상념에서 깨어나 가속페달을 밟았다.

 

눈을 너무 갑자기 들어 뿌연  진눈깨비만이  시야를 가득히 채운다.

......그렇구나....

그동안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짙은 안개 속에서

오로지 내 발끝만을 쳐다 보며 조심스레 한 발짝씩 옮겨왔었지.

그러다...

급해지는 마음에 쫓겨..

어쩌면, 너무 갑자기, 너무 멀리 내다보려 했을 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 머리를 세게 치고 지나간다.

 

다시 발걸음을 늦추고,

한 발짝, 또 한 발짝,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발끝을 보며 조심스레 걸어야겠다.

빛은 반드시 거기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성급하게 달려간다 해서 빛과의 거리가 결코 단축되진 않을 거란 커다란 깨우침을 얻고

한 달 보름에 걸친 기나긴 몸살을 지나간다.

 

 

** '다음' 검색에서 '눈먼 자들의 도시' 포스터 이미지를 빌려왔다.

     참고로...이 영화에서 '줄리언 무어'는 '눈먼 자들의 도시'안에서 유일한 눈 뜬 자라는 사실..

     배역과는 관계없이 그녀의 시선만을 참고해 주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