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고음악 콩쿨에 다녀와서.....
2007년 8월 3일
** 콩쿨 장소인 춘천예술문화회관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아들..
** 콩쿨 전 '거음악 세미나' 기간 중 수강생 연주회에서 김 희경 선생님과 함께 비발디의 '바다의 폭풍'을 연주합니다.
첼로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비올라 다 감바' 연주자이신 '히라오 마사코' 선생님과 함께...
** 춘천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구봉산 '산토리니' 잔디 광장에서...
** 콩쿨 기간 묵었던 '두산 콘도' 커피샵에서 비오는 강변을 바라보다...
상윤과 저는 지난 7월 24일부터 29일까지 춘천시에서 해마다 열리는 ‘춘천 고음악 페스티벌’에 다녀왔습니다.
상윤은 2006년 4월 6일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이신 ‘조 진희’ 선생을 처음 만났고,
작년 7월 30일 난생 처음 콩쿨에 나갔습니다.
아들이 리코더를 처음 접한 것은 2005년 7월 즈음이었어요.
플롯을 전공하시는 선생님으로부터 취미 삼아 배웠는데
그분이 갑자기 미국으로 가시게 되면서
지인의 소개로 ‘조 진희’교수님을 사사하게 된 것이지요.
리코더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작년 4월 이후라고 보시면 됩니다.
자폐인 특유의 음악적 감각을 타고난 아들은
초등 3 학년 음악수업 덕분에 소프라노 리코더를 접했고,
온갖 고생 끝에 운지법을 익히고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마자
‘개구리 왕눈이’처럼 리코더를 끼고 다니면서
찬송가에, 트로트에, OST에...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노래를 불더군요.
키가 맞지 않으면 마음대로 조를 바꾸기도 하고,
리코더로 낼 수 없는 없는 음은 묵음으로 생략해 한 박자 쉬고 불기도 하면서...
2 학년 2 학기 무렵, 동네 피아노 학원에 부탁해서 반 년 간 분위기 익히고
- 가방 들고 왔다 갔다 하며 피아노 치는 것 구경하는 정도였지요. -
3 학년 때 리코더 배우기 위해 도움을 청한 일을 계기로
동네 사시는 마음 푸근한 피아노 선생님으로부터 개인지도를 받게 되었답니다.
진도에는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선생님과 놀다시피 했는데,
피아노의 정확한 음만 익혀도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 지나 어느 순간에 기적처럼
‘자신의 반주에 맞추어 찬양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제 기도 제목이었구요.
아주 아주 천천히 아이는 피아노와 친구가 되어갔습니다.
3 년이란 긴 시간 동안 심성 고운 피아노 선생님은 크게 화 한 번 내지 않으시고
상윤을 으르고 달래며 꾸준히 일주일에 두 내지는 세 번의 만남을 거듭하셨습니다.
체르니 30번 후반부 까지 그분에게 지도를 받았습니다.
<<<정말 축복 받으실 겁니다. >>>
‘조 진희’ 교수님께 지도를 받기 시작하면서 아들과 저는
‘고음악의 세계’- 바로크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 그리고 그 이전 시대의 음악-을
재발견하게 되었습니다.
<< 불과 4 년 전 플롯 선생님을 만나기 전, 저는 음악에 대해 거의 문외한이었습니다.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 음악사를 읽으며, 시대적 특징들을 익히고, 음악 이론과 용어를 외우려 애썼고,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아들의 통역(!!)을 하기 위해 레슨에 따라 들어 가며 아들과 함께 음악을 알아 갔습니다.
그러나 리코더 불기는 여러 번 시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배울 수가 없어 저는 하나도 못 붑니다.
어느 날 연습을 시키며 잔소리를 하는 제게 어느 날 상윤이 건방지게 스리 묻더군요,
‘엄마는 리코더 불 줄 아세요?’ 하고...
저는 대답했지요. ‘불 줄은 몰라도 들을 줄은 안다!’라고... ㅎㅎ >>>
리코더의 기초를 제대로 다지지 못 했기 때문에 조 선생님께는 주 1 회,
비장애 학생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레슨은 받으면서
한국예술종합학교 4 학년에 재학 중인 작은 선생님께 주 1 회 레슨을 또 받고,
상윤에 대해 잘 알고 저와 절친한 피아노 선생님께 주 2 회 2 시간씩
청음과 시창, 피아노 연주 등, 음악 전반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 혹시라도 관심 있는 분들께는 성의껏 조언 드리겠습니다.
음악 레슨내용은 기록하고 있구요, 어렸을 때 받던 갖가지 치료 교육의 비용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돈이 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지금 중 2 학년이니 앞으로 4 년 반 후, 대학 입학할 무렵이면
제법 그럴싸한 모습의 연주자가 되리란 희망을 품고
열심히 레슨 받고, 연습 시키고,
아들 또한 ‘일등’에 대한 욕심을 부려가며 음악공부를 합니다.
작년 콩쿨 때엔 지정곡을 받아 한 달간 연습해서 무대에 섰는데
아이가 어찌나 경직되어 있던지,
연주가 끝나고 나서 보고 있던 제 어깨에 쥐가 날 정도였어요.
상윤은 ‘처음이라서 조금 떨리기도 했고 긴장이 되긴 했지만 참았어요.’라는 표현을 해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아... 이 아이도 다른 사람들처럼 무대에서 떨기도 하는구나...’,
미련한 어미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 후 몇 번의 작은 연주회 때 지나치게 긴장한 모습을 보여,
혹시라도 ‘무대 공포’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을 무척 했지요.
이번 콩쿨엔 자유롭게 곡을 선택하기 때문에
‘안토니오 비발디’의 콘체르토 1 번- 바다의 폭풍을 예선 곡으로 잡아 연습을 했습니다.
상당히 빠르고 난이도가 높은 곡이어서
곡 선택을 잘 못 하지 않았나 하는 회의도 들었지만
입상은 꿈도 꾸지 않았고,
다만 어려운 곡을 연습해서 기량을 키울 좋은 기회라고 받아들였지요.
6월 21일,
상윤이 레슨을 받던 도중, 급체로 인해 쓰러졌습니다.
119의 앰뷸런스를 타고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었고,
1박 2일 동안 CT 촬영과 뇌척수검사, 뇌파검사까지 마치고
이상 없다는 소견을 받아 퇴원을 했습니다.
응급실 귀퉁이에서 간이침대조차 얻지 못 해
힘없는 아이를 의자에 앉혀 놓고
참 많은 생각들이 뇌리를 오고 갔습니다.
<< 건강한 것만으로도 이만큼 축복인 것을..
왜 그렇게 욕심을 부렸는지.
그저 내 곁에서 착하게 살고 있음을 감사해야 하는데
무엇하러 그렇게 헛되이 성취하려 안달했는지,
욕심이 지나침을 아무리 깨우치려 해도 소용없으니
내 가장 아픈 손가락을 꺾어 나를 가르치심이리라.
다시 감사하고 살아야겠다.
천지를 다 얻어도 이 귀한 열매가 다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을,
아둔한 어미는
이렇게 힘들게 진리를 터득해 간다.
응급실에 아들을 뉘어 놓고 세상이 아득해짐을 느낀다.
여태 내가 지표로 삼으며
밀고 끌고 왔던 가치들이 와르르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그저 아들의 무사안위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버리고, 뭐든지 다 포기할 거란 확신을 굳힌다.
다행히 뇌척수검사, 소변검사, 혈액검사, 씨티 촬영 모두 이상 없다는
현재 결과에 비로소 눈물이 흘러내린다.
아침에 교수님이 출근하시면 진료해 보고 뇌파검사나 MRI를 찍어 볼 예정.
졸리지도 않다.
하지만 내 눈 앞에서 쓰러지던 아들의 모습이
고장 난 비디오마냥 자꾸 돌아가서 소름 끼친다.
너무나 감사해야할 것은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없었더라면...
생각만 해도 오금이 오그라든다.
기도 해 주세요. >>>
- 그날 밤, 아들을 응급실에 뉘어 놓고 출장 중 이던 남편에게 보냈던 메시지입니다.-
저와 가족들은 콩쿨 출전이 아이에게 과도한 스트레스가 되지 않았을까 해서
내보내지 않으려 했지만, 상윤은 펄펄 뛰며 나가겠다고 우겼습니다.
대충 흉내만 내게 해 참가시키기로 결정하고
하루 연습시간이 30 분 넘지 않게 조절해 가며 아~~주 편안하게 준비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반주와 맞춰 연습했을 때 상당히 안정된 모습을 보여서,
실전에서도 그렇게만 하면 된다고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지난 한달 열흘 남짓, 저는 아주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아이가 쓰러지기 전엔...
가끔씩 지나치다 싶을 만큼 큰 기대를 할 때도 있었고,
건강하고 불평할 줄 모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장애 아이들보다 더욱 힘들게 아이를 밀어 붙일 때도 있었습니다.
아들이 정말 힘겹게 비장애인의 세계를 버텨내고 있다는 생각을 미처 못 했던 것이지요.
응급실에서 힘없이 앉아 할아버지께 전화하며
‘할아버지, 저 때문에 많이 놀라셨지요? 저는 괜찮아졌어요.
저는 검사 받고 집에 나중에 갈 거니까
걱정 마시고 먼저 주무세요. 할아버지, 사랑해요‘ 라고 말하는 아이를 보며
작은 아빠와 저는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답니다.
혼자 들었으면 거짓말이라 했을 정도로, 상윤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들에는
사랑과 배려가 넘치고 있었습니다.
사소한 개인적 성취감이나 아이의 사회적 자립 등을 목표 삼아 정신없이 달려 왔던
제가 한없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아들은 저보다도 훨씬 속 깊은, 따뜻한 청년으로 자라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다시는 인간적인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아이가 건강하게 우리 곁을 지키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밝은 한 개인으로 자라남을 감사하게 여기고 살겠다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상윤의 변화는 기적과 다름없습니다.
반향어, 뜻 모를 중얼거림, 수면 장애, 탠트럼...
온갖 힘듦을 참아내며
이곳에서 만나는 수많은 부모님들과 같은 고통을 겪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182cm의 훤칠한 키만큼 훌쩍 자란 지혜와 배려로
온가족의 기쁨이 되어버린 사랑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저는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앞으로 수많은 상윤이와 같은 아이들을 이곳에서 만나게 해달라고,
그래서 부모님들의 고단함을 더 큰 기쁨으로 채워달라고 말입니다.
<<< ‘주먹을 꽉 쥐고 있으면 아무 것도 잡을 수 없지만,
손을 활짝 펴고 있으면 모든 것을 잡을 수 있다‘는 말처럼
제가 아들을 다시는 꽉 쥔 손으로 잡고 있지 않기를 기도드립니다.>>>
7월 24일부터 28일까지 아들은 저와 함께 고음악 세미나에 참석했고
29일 오전 9시부터 ‘춘천 고음악 콩쿨 리코더 독주 부문 중등부 예선’을 치뤘습니다.
맛있는 춘천 막국수로 점심을 먹고 있을 때, 예선 통과했다는 낭보를 들었어요.
오후 1시부터 ‘춘천 예술 문화회관’ 대강당 드넓은 무대에서 본선이 열렸습니다.
한 치의 떨림도 없이 상윤은 ‘마르첼로’의 소나타를 연주했는데,
곡 중간부에 살짝 틀린 곳에서도 너무나 유연하게 넘어가더군요.
목관 알토리코더의 청아한 소리를 들으며 또 한 번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날 저녁에 부산과 마산 사는 동생들 식구들이 함께 모이기로 되어 있어서
본선 진출한 것만 해도 훌륭하다며 고등부 본선 연주를 보고 서울로 향했습니다.
서울에서 친정 식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있을 때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송 상윤이 중등부에서 “장려상”으로 입상했다구요.
이번 콩쿨에는 중등부에서 여학생 5 명, 남학생은 상윤이 혼자 나갔는데,
모두 경력이 4~5 년씩 되는 베테랑들입니다.
그래서 입상은 아예 꿈도 꾸지 못 했습니다.
아들은 발달장애 3 급의 ‘훈장’을 달고서,
비장애 학생들과 꼭같은 조건으로 출전하고
꼭같은 기준의 심사를 거쳐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상윤이 워낙 차분하고 정직한 연주를 해서
장려상을 받게 되었나 봅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본선곡도 예선 곡처럼
좀 더 멋진 것으로 고를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그것 또한 제 욕심 같아서 접어두기로 했지요.
상윤은 평소에 입버릇처럼 ‘상을 받고야 말테야’라고 되뇌었고
그의 소망처럼 상을 받고야 말았습니다.
<<< 참고로 덧붙이지만, 저는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서
‘상’에 대해 강조나 강요하며 키우지 않았는데, 한자 급수 시험 이후로
아들은 ‘좋은 결과’ 혹은 ‘상’에 대해 매우 기대를 하더군요.
그 역시 칭찬 받고, 대접 받고, 상 받는 것의 기쁨을 아는 듯합니다.>>>
정말 기쁜 소식이라서 그간의 과정들을 소상히 알리고 싶기에
긴 글을 썼습니다.
함께 기뻐해 주시고,
많이 많이 격려해 주시고,
더욱 더 따뜻한 눈길로 지켜 봐 주시길 바랍니다.
** 2007 년 이맘때 쓴 글입니다..
2006년부터 해마다 여름이 되면 춘천 고음악 페스티벌에 참가하곤 했는데
올해 재정난과 주최측의 사정으로 인하여 콩쿨만 열린다는 소식에 서운한 마음만 커져가네요..
아들의 여릿여릿한 모습을 뒤져보다가 이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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