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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살기..

왕의 뒷뜰을 거닐다...'비원'에서 보낸 가을 하루...

by 슈퍼맘빅토리아 2011. 11. 20.

가을이 왔던가....

흘깃 뒤돌아봄도 없이 달음박질 치는 시월의 꼬리를 잡으려

분주히 나선 아침.

창덕궁 돈화문 앞에 도착하니 열시무렵이었다.

이미 국적 초월한 관람희망객들은 작은 구름떼처럼 매표소 부근에 몰려있었고

한참 기다려 안내를 받은 우리는 '후원특별관람'을 신청하기 위해 창덕궁의 허리 부근에 있는 함양문으로 달음질쳤다.

후원의 자연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관람객을 100명으로 제한해 하루에 7번만  특별관람이 운영되는데

시월 한 달 동안 150명으로 인원을 늘리지만 그중 50명은 인터넷 예약으로 받는다 하니

미리 가서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다 싶었다.

열한 시가 되기 전인데도 우리가 들어갈 관람시간은 12시 삼십분..

그나마 몇 장 남지 않은 터였다.

기다리는 동안 낙선재 일대를 어슬렁거리며 이방자 여사의 자취를 더듬어 보기도 하고

'반송(盤松 )'이라하여 땅에서부터 여러갈래의 줄기로 갈라져 부채를 펼친 모양으로 자라는 소나무의 위용에도 감탄을 했다.

 

 

 

 

반송(盤松)

 

 

 

창덕궁은 조선왕조 제3대 태종 5년(1405)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며

창건시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침전인 희정당, 대조전 등 중요 전각이 완성되었다.

 그 뒤 태종 12년(1412)에는 돈화문이 건립 되었고 세조 9년(1463)에는 약 6만2천평이던 후원을 넓혀

15만여평의 규모로 궁의 경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5년(1613)에 공사가 끝났으나

다시 1623년의 인조반정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가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화재가 있었으며, 1917년에 대조전 과 희정당 일곽이 소실되어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 등 많은 건물을 철거하여 창덕궁으로 이건하였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 정궁으로 사용한 후 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년 동안 역대 제왕이 정사를 보살펴 온 법궁이었다.

 창덕궁 안에는 가장 오래된 궁궐 정문인 돈화문, 신하들의 하례식이나 외국사신의 접견장소로 쓰이던 인정전,

국가의 정사를 논하던 선정전 등의 치조공간이 있으며, 왕과 왕후 및 왕가 일족이 거처하는 희정당, 대조전 등의 침전공간 외에

 연회, 산책, 학문을 할 수 있는 매우 넓은 공간을 후원으로 조성하였다.

 

정전 공간의 건축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여 높게 하였고, 침전건축은 정전보다 낮고 간결하며,

위락공간인 후원에는 자연지형을 위압하지 않도록 작은 정자각을 많이 세웠다.

 

건물배치에 있어 정궁인 경복궁, 행궁인 창경궁과 경희궁에서는 정문으로부터 정전, 편전, 침전 등이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궁궐의 위엄성이 강조된 데 반하여, 창덕궁에서는 정문인 돈화문은 정남향이고, 궁안에 들어 금천교가 동향으로 진입되어 있으며

 다시 북쪽으로 인정전, 선정전 등 정전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편전과 침전은 모두 정전의 동쪽에 전개되는 등 건물배치가 여러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날 자연스런 산세에 따라 자연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산세에 의지하여

인위적인 건물이 자연의 수림속에 포근히 자리를 잡도록한 배치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완전한 건축의 표상이다.

 또한, 왕들의 휴식처로 사용되던 후원은 300년이 넘은 거목과 연못, 정자 등 조원시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함으로써

 건축사적으로 또 조경사적 측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후원은 태종 5년(1405) 창덕궁을 창건할 때 후원으로 조성하였으며, 창경궁과도 통하도록 하였다.

 

창덕궁 후원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조원 시설로서

 자연적인 지형에다 꽃과 나무를 심고 못을 파서 아름답고 조화있게 건물을 배치하였다.

창덕궁 후원 이미지

대부분의 정자는 임진왜란때 소실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정자와 전각들은 인조 원년(1623)이후 개수·증축된 것이다.

 이 곳에는 각종 희귀한 수목이 우거져 있으며, 많은 건물과 연못 등이 있어

왕과 왕비들은 이곳에서 여가를 즐기고 심신을 수양하거나 학문을 닦고 연회를 베풀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전통건축으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이 고도의 조화를 표출하고 있으며,

 후원은 동양조경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는 세계적인 조형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의 역사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궁궐지」, 「창덕궁조영의궤」, 「동궐도」 등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1830년경에 그린 「동궐도(국보 제249호)」가 창덕궁의 건물배치와 건물형태를 그림으로 전하고 있으며,

궁궐사와 궁궐건축을 연구 고증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창덕궁은 사적 제12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돈화문(보물 제383호), 인정문(보물 제813호), 인정전(국보 제225호),

 대조전(보물 제816호), 구선원전(보물 제817호), 선정전(보물 제814호), 희정당(보물 제815호),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4호), 다래나무(천연기념물 제251호)등이 지정되었다.

창덕궁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문화 유산적 가치

동아시아 궁전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 궁으로 주변 자연환경과의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하다

등재기준 : 세계문화유산기준(Ⅱ), (Ⅲ), (Ⅳ)
  • (Ⅱ) 일정한 시간에 걸쳐 혹은 세계의 한 문화권내에서 건축, 기념물조각, 정원 및 조경디자인,
  • 관련예술 또는 인간정주 등의 결과로서 일어난 발전사항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유산
  • (Ⅲ) 독특하거나 지극히 희귀하거나 혹은 아주 오래된 유산
  • (Ⅳ)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
  • (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 정보.
  • http://www.cha.go.kr/korea/heritage/world_heritage/culture_treasure_04.jsp?mc=KS_01_03_01)

 

 

창덕궁 홈페이지  :  http://www.cdg.go.kr/main/main.htm

 

 

 

 

낙선재 입구의 감나무...궁궐에서 기가 죽어 키도 줄었나 마구 짐작했더니

사람들의 통행이 하도 잦은 탓에 땅이 다져져 기를 못 편 나무가 제대로 자라지 못 했다 한다.

 

 

낙선재(樂善齋)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가 하나의 일곽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통칭하여
낙선재라 부른다.
낙선재는 1847년(헌종 13년)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어졌다.
이 곳은 마지막 황후인 윤황후(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덕혜옹주와
이방자 여사등이 1963년부터 1989년까지 거처하던 곳이다.
아름다운 화계(꽃계단)와 꽃담, 다채로운 창살들이 돋보인다.

 

 

 

 

 

선비의 기개를 상징하는 '회화나무'...

 

 

안내책자를 아무리 뒤지고, 창덕궁 홈페이지를 훑어도 이 정자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적어도 건물 이름만큼은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 조금 씁쓸한 기분이었다.

한지문을 사방에 달고 마루까지 있으니 어쩌면 정자나 누각이 아닐 수도 있겠다.

 

 

낙선재의 대문인 장락문(長樂門)은 달에 있는 신선의 궁궐인 장락궁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못 말릴 한옥의 매력이다.

문 하나를 활짝 열어젖히면 또 하나의 세계가 열리고.

그 세계 안에 또 다른 세상으로 인도하는 문이 있고...

하나씩 하나씩 열다 보면 첩첩 쌓인 우주를 품은 액자가 된다.

 

 

문틈으로 들여다 보다...

모든 틈은 시선을 끌어당긴다.

한옥 대문의 나무 틈 , 그리고 비스듬히 열린 베네치언 블라인드의 빗살 틈은

설핏 보이는 내밀함으로 인해 우리의 상상을 부추겨 이야기를 끌어낸다.

 

 

 

12시가 되어 인솔자인 문화재 해설사 선생님을 따라 드디어 '후원'으로 들어왔다.

흔히 비원(秘園), Secret Garden이라 불리는 '후원'은 창덕궁의 뒷뜰이다.

정사에 지친 왕께서 머리를 식히려 거닐기도 하시고, 각종 문과가 치러지기도 했으며 예전에는 호랑이와 산짐승들이 출몰할 정도로 깊은 산을 끼고 있다.

'후원'의 의미는 생태적 시각으로 볼 때 더욱 각별하다.

9만 평에 이르는 드넓은 궁중 정원인 창덕궁 후원은 홍릉 수목원과 더불어 강북에서 가장 소중한 숲이자 한국적 조경미학의 대명사와 같은 존재로,

 사람과 동식물 모두에게 중대한 가치를 갖는다.

 

창덕궁을 찾으려면

창덕궁 관람 방법은 얼핏 들어서는 무척 까다로워 보이지만 정작 가보면 그렇지도 않다. 아래와 같은 세 가지 방법 중 하나를 택하면 된다. 방식에 관계 없이 월요일은 휴궁이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으며, 더욱 상세한 정보는 창덕궁 홈페이지 http://www.cdg.go.kr 를 참고하면 된다.

▲ 일반관람 :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1시간 20분 동안 기본구역을 관람하는 방식. 입장료 3000원. 매일 매시 15분과 45분에 입장하며 예약도 필요 없고 인원 제한도 없기 때문에 그냥 찾아가면 된다(목요일은 제외). 창덕궁이 낯선 분들은 처음부터 자유 관람 욕심을 내지 말고 우선 한번은 일반관람을 하실 것을 권한다.

▲ 자유관람 : 하루 종일 마음대로 관람하고 사진도 찍을 수 있는 방식. 4~11월에 한해 매주 목요일에만 실시하며, 예약은 필요없다. 입장료 15000원. 하루 1000명으로 인원을 제한하지만 여기에 걸려 발길을 되돌리는 일은 별로 없을 듯하다. 불안할 경우 창덕궁 관리소에 전화로 확인해 보면 된다(762-0648). 단, 창덕궁 내에는 음식물 반입과 흡연이 일절 금지되어 있음은 고려해야 한다.

▲ 특별관람 :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특정구역을 관람하는 방식. 옥류천 특별 관람과 낙선재 특별관람이 있다. 입장료 각 5000원.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는 것이 안전하며, 약간의 분량은 현매용으로 남겨두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예약 없이 가도 표를 구할 수 있다(목요일은 제외).

 

 

 

부용지(芙蓉池)와 부용정(芙蓉亭)

조선의 궁궐 연못은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사상에 의해서 조성되었다.
부용지도 땅을 상징하는 네모난 연못 속에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만들었다.
연못의 동남쪽 모퉁이 돌에는 뛰어오르는 형상의 물고기 한 마리가 새겨져 있다.
부용정(1792년 건립)은 十자형을 기본으로 하되, 남쪽으로 양쪽에 한 칸씩
보태 다각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정자이다.
1795년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화성에 다녀온 뒤
너무 기쁘고 즐거워서 부용정에서 규장각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주합루(宙合樓)

주합루는 1776년(정조 즉위년)에 지은 2층 누각이다.
아래층은 왕립도서관인 규장각 서고이고 위층은 열람실이다.
초기 왕실도서관으로 출발한 규장각은 점차 정책연구기관으로 기능하여
정조의 개혁 정치와 조선 중기 문예 부흥의 산실 역할을 하였다.
채제공, 정약용, 이가환, 박제가, 유득공,이덕무 등 적서(嫡庶)의 구별 없이 다양한 인재들이 여기서 활동하였다.
주합루라는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다. 주합루의 정문인 어수문(魚水門)에는 임금을 물에, 신하들을 물고기에 비유하여 군신의 융화적 관계를 함축한
뜻이 담겨 있다. 어수문은 임금이, 그옆의 작은 문으로는 신하들이 출입했다.

부용지의 오른쪽 어수문으로 올라가면 보이는 이층으로 된 누각이 주합루이고 윗 사진의 오른쪽 상단에 있다.

 

 

 

 

 

 

 

 

 

 

불로문(不老門)

불로문은 하나의 통돌을 깎아 세운 문으로 임금이 무병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이 문을 지나면 장수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우루 몰려서 문을 통과하는 관람객들...

엉겁결에 따라서 지나기는 했지만...과연 나도 천수의 꿈을 품고 있지는 않았나 점검해 볼 일이다.


 

불로문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愛蓮亭)

숙종18년(1692년)에 만들어진 연못과 정자이다.

숙종은 『애련정기(愛蓮亭記)』에서 '연꽃은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고 우뚝 서서 치우치지 아니하며

지조가 굳고 맑고 깨끗하여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에 이러한 연꽃을 사랑하여 새 정자의 이름을 애련정이라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문화재 해설사 김 선생님...

함자를 미처 다 외우지 못하여 성씨만 기억에 남아있다.

전형적인 서울토박이신 듯하여 어찌나 곰살맞게 설명을 해주시는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나의 문화적 동지와 함께 맨 앞줄에서 졸졸 따라다니며 창덕궁과 비원의 역사에 대해 듣고 또 들었다.

 

 

 

 

 

연경당(演慶堂)과 선향재(善香齋)

『궁궐지』에 의하면 1828년(순조28년) 왕세자였던 효명세자가 사대부
집을 모방하여 궁궐 안에 지은 120여칸 민가형식의 집이다.
대문인 장락문(長樂門)은 달에 있는 신선의 궁궐인 장락궁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주인대감의 일상거처인 사랑채와 안주인 등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로 나뉘어져 있다.
선향재(善香齋)는 서재로 이용되었다.
열린 문 안으로 계속 들어가다 보면 바깥채와 안채가 연결되어 있다.

겉으로 보기엔 담이 가로 막혀 있어 통하지 않을 듯하나 실은 내통하고 있다.

조선 시대 문화의 일면을 보는 듯하여 우리는 실소를 금치 못 했다.

 

 

왕궁이 아니라면 사당이 있을 자리였다 한다.

그러나 이미 왕가의 지정죈 사당이 따로 있어 이곳에서는 정자를 지었다 한다.

 

 

드디어 비원에서도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관람지와 관람정이다.

올해는 날이 하도 수상하여 가문 탓에 단풍이 그리 곱지 못 했고 우리가 갔던 때의 다음 주에 절정일 것으로 예상된다 했다.

추측컨대 관람정 또한 방지(장방형의 못)이 아니었을까 한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태이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 때 형태를 지도 모양으로 바꾸지 않았을까 짐작한다고 전한다.

 

관람정(觀纜亭)

관람정은 평면이 부채꼴 모양으로 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태의 정자이다.
관람정 앞 연못은 대한제국 말기나 일제 초기에 현재와 같이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관람은 닻줄 즉 배 띄움을 구경한다는 뜻이다.

 

 

 

 

 

관람지에 투영된 하늘...

 

 

숙종의 글씨라 한다.

내용은 사뭇 과장된 느낌으로 다가오지만 자부심으로 빛난다.

소요암에는 인조의 玉流川이라는 어필 위에 숙종의 오언절구시가 새겨져 있다.

飛流三百尺 폭포는 삼백척인데
遙落九天來 멀리 구천에서 내리네
看是白虹起 보고 있으면 흰 무지개 일고
飜成萬壑雷 골짜기마다 우뢰소리 가득하네

 

 

드디어 옥류천...

사진으로 봤을 때 제법 규모 있는 계곡과 바위로 생각했는데

실망이 뭉게구름처럼 솟아오른다.

 경주의 포석정처럼 바위에 홈을 파 흐르는 물에 잔을 띄우고 놀던 왕과 신하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래..그 시대분들은 체구도 자그마하셨겠으니 이 바위가 더 커 보이셨겠구나..)

 

옥류천

옥류천은 창덕궁 후원 북쪽 깊숙한 곳에 흐르는 개울을 가리킨다.
인조 14년(1636년)에 커다란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 둥근 홈을 만들어 옥과
같이 맑은 물이 바위 둘레를 돌아 폭포처럼 떨어지게 만들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여기에 둘러앉아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었다.
근처의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청의정(淸漪亭) 등과 함께 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간직하여

많은 임금들에게서 특히 사랑받았던 곳이다.


 

 

창덕궁에서 가장 고왔던 단풍나무...

 

 

 

 

 

 

 

 

숨은 그림 찾기...

나의 '문화적 동지'인 숙 여사.

어느 커다란 DSLR을 걸머진 아주머니께 찍어달라 했더니 역시 구도가 다른 그림이 나온다.

 

 

영화당(暎花堂)

영화당은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현재 건물은 숙종 18년(1692년)에 재건한 것이다.
왕족의 휴식공간이자 이 건물의 앞마당인 춘당대에서는 친히 임금이 참석한 가운데 인재 등용을 위한 과거를 실시하였다.

 영화당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수령이 엄청난 귀한 나무들이 많은 비원에서 유독 눈길을 잡아끄는 단풍나무다.

유심히 보고 있다가 해설사께 '저 나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여쭙자  다가와서 설명해주신다.

사람으로 따지자면 온갖 종류의 암에 다 걸린 생태라 하신다.

암덩어리들을 온몸에 훈장처럼 달고도 아랫둥치에서 새 잎을 피우는 질긴 생의 의지...

왠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에 등장하시는 어머니가 떠오른다.

 그인지 그녀인지 모르지만 저토록 절절한 삶의 애착은 어쩐지 모성을 띄고 있는 것만 같다.

 

 

 

영화당을 끝으로 다시 비원 입구로 향하는 고갯길을 지름길로 택해 돌아선다.

 

 

 

 

 

해설사께서는 이 문을 그냥 지나치지 말라 하신다.

돌 하나, 나무 한 그루에도 깊은 역사가 숨 쉬는 이곳에

아무리 작은 문이라 한들 그냥 문이런가.

한번 들어오면 죽어야 나가는 것이 궁인들의 신세였다.

숙종의 비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계략으로 폐비가 되어 이 문으로 나갈 때,

그녀는 당신이 유일하게 살아서 다시 이 문으로 들어올 사람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천연기념물 194호 향나무...

수령이 750년 되었다 한다.

 

 

 

 

 

 

 

 

워낙 크고 우월한 자태인지라 하나의 프레임에 담기는 불가능했다.

 

 

 

 

다시 '돈화문' 앞에 서서 비문을 꼼꼼히 읽었다.

 

예정했던 것보다 훌쩍 길어진 산책을 황망히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왕의 발자국 위에 포갰던 우리들의 걸음을 떠올리며

가을 하루의 오후가 지났다.

 

아이들에게 '비원'의 추억을 제대로 남겨주고자 '창덕궁' 홈페이지와 위키피디아, 네이버 지식인, 그리고

오마이뉴스의 기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39167 )를 참조하고 인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