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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이야기..about Daniel

스무살......다음 정거장은 어디인가요?

by 슈퍼맘빅토리아 2012. 4. 14.

 

 

4월 28일 서울대학 병원에서 열리는 '한국 자폐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 부모의 사례로 발표할 원고입니다.

끝부분을 읽으시면 지난 겨울 동안 지독하게 앓은 몸살의 실체를  알게 되실 겁니다.

학회지에 실릴 원고이니 옮겨가시지는 마시고, 원하시면 방명록에 이메일 주소를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쓰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상윤씨와 함께 지내온 20년을 돌이켜 보면서, 죽을 만큼 힘들었던 기억은 모두 어디다 숨어버렸는지

오히려 요즘이 가장 견디기 힘들게 여겨집니다.

저와 아들을 둘러싼 세상이라는 사막에서 찾아서 걸어오던 오아시스가 한갖 신기루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이 닥쳐서 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도 다시 일어섭니다.

저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언제나 믿고 응원해주는 가족과 친구들이 계셔서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일으켜 세우시는군요.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스무 살...... 다음 정거장은 어디인가요?

 

 

 

초보 vs. 능력자

 

나는 단지 대한민국에서 ‘자폐성 장애인’의 어머니로서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 지난 스무 해를 살아오며

수많은 어려움과 시행착오를 겪어 내었고 나름 어려움을 잘 이겨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자폐 앞에서

누가 감히 ‘경력자’, ‘능력자’가 될 수 있을까? 성인자폐인에 대한 지침서나 성인자녀 양육 수기들이 흔치 않은 상태에서

 아이의 스무 살 이후를 준비하는 일은 여전히 나를 오그라들게 만든다. 앞으로 살아내야 할 시간을 예상해보고자 하지만

 정말 앞길이 깜깜하게 보이지 않아서 지난 이십 년은 전초전에 지나지 않았다는 두려움에 마음이 답답해올 때가 많다.

 이런 이유로 금년 추계 학술대회의 테마로 ‘초기 성인기 자폐성 장애인’들의 사회전환을 택해 주신 것에

 이 길을 걸어가는 한 사람의 부모로써 진심으로 감사를 느낀다. 이번 글에는 아들과 함께 지나온 이야기를 풀어내고

 앞으로 소망하는 바를 담아보려고 한다. 우리 아이들에 대한 공부를 하시는 분들,

 내 뒤에서 나와 같은 길을 걸어오시는 분들에게

작은 사례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네비게이션이 필요해

 

내 아들 상윤씨(성인이 되었으니 그를 부르는 일에서부터 존중을 시작하고자 한다)는 1992년 8월, 의학적으로 볼 때

비정상적인 소견이나 배경 하나 없이 말짱하게 태어났다. 그런데 18개월 무렵부터 이유 없는 떼 부리기와 수면장애 및

섭식의 어려움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자폐증’에 대한 정보가 흔했다면

한 번쯤 의심해 봤을 수도 있지만, 그저 일반적인 성장에서 약간 비껴난 모습이라고 생각했고

아이가 35개월 되었을 즈음에야 주변의 권고로 찾아간 소아정신과에서도

‘반응성 애착장애’, ‘발달이 좀 늦을 뿐’이라고 진단을 내려주었을 뿐이다. 36개월부터 개인 연구소들에서

아이의 치료와 교육을 병행했고 요즘의 엄마들과 크게 다름없이 좋다는 치료는 기를 써서 다 해보고,

아이의 두뇌발달이나 정서조절에 좋다는 대체의학 치료를 찾아다니고

 건강보조 식품이며 한약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먹였다.

 종합병원에서 ‘고기능자폐’로 진단을 받고 장애 등록을 한 초등학교 4 학년 때까지,

나는 ‘자폐증’은 내 아이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줄 알았다. ‘무조건적 열성’은 뚜렷한 가이드라인이 없던 당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래를 두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변명하고 스스로 위로해본다.

 그렇기에 여전히 정확한 진단, 정확한 치료지침이 제공되지 않는 지금의 현실을 우려하며

어린 자폐아이를 키우는 부모를 만나면 나의 예를 들어 ‘과유불급’이며 믿을 사람 없음을 경계하라고

뼈있는 우스갯소리를 하곤 한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장애인 등록을 한 이후, 나는 심리적 혼란이 심했던 것 같다.

또한 그 당시는 어느 정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던 인지학습에서 점점 한계가 느껴지던 즈음이었다.

그 무렵 우연히 중앙대 사회복지관에서 ‘장애인의 사회전환’이라는 부모교육 수업에 참석하게 되었다.

 내 아이가 스무 살이 되고 중 장년기를 거쳐 ‘자폐노인’이 된다는 사실을 직면하는 일은 놀랍고 고통스러웠다.

아들의 미래를 직시하고 생활 중심의 교육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는 인식을 어렴풋하게나마 처음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보고도 그 방향을 쉽게 따르지 않았다. 나에게 아이의 스무 살은 여전히 머나먼 미래로 남아있었고,

 상윤이의 서번트적 재능이 보이는 음악 교육에 중점적으로 치중함으로써

 ‘예정된 미래’를 부인하고 극복해보고자 하였던 것이다.

 

상윤씨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2007년 6월 21일, 아들에게 닥친 ‘뇌전증(간질)’의 첫 발작은

그동안 내가 그려오던 아이의 미래상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 그 후 일 년 동안 두 달 단위로 찾아오던 6번의 발작으로

 나는 완전히 두려움과 좌절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 후에야 아이의 건강을 먼저 돌아보게 되었고,

비로소 상윤씨가 평생 가야 할 길을 인정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는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되었다.

 

상윤씨를 ‘훈련’ 시키는 일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작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10 분 걸리는 학교의 등하교나

 동네에서의 잔심부름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하였고 어느 정도 혼자서 옷을 챙겨 입는다거나

 상차림을 돕는 정도는 가능했다. 그러나 ‘자립’의 관점으로 새롭게 바라보자

상윤씨가 누군가의 지시나 허락이 떨어지기까지 움직이려 들지 않는다는 것,

상윤씨가 자발적으로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는 일을 내가 몹시 힘들어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장애를 가졌다는 선입견이 주는 낙인에 얹어 학교와 과외의 교육 시간에 쫓겨

더 중요한 자발성과 자율성을 간과해왔던 것이다.

 

이를 바로잡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선, 자신의 요구를 소리 내어 말하는 습관에서 시작해야 했다.

 꼼꼼하게 집안일을 잘 돕는 아이를 믿어주고 요리의 기초가 되는 불 쓰는 법과 칼질, 빨래를 구분하는 것에서부터

 개는 것까지 일일이 가르쳤다. 상윤씨는 엄마가 자신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과제를 완수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자부심을 가졌다. 다음 단계는 핸드폰 사용이었다.

아이를 집에서 혼자 내보내고 난 후 안전하게 돌아올 때까지 겪어야 하는 불안 때문에

먼저 핸드폰으로 전화와 문자를 주고받는 일을 연습하고 도착하는 곳마다 문자를 보내 확인하도록 연습했다.

 지금은 잔소리를 듣기 싫어해 가끔 전화를 안 받기도 하고 문자보고를 생략하기도 하지만

고등학교 재학 시절 내내 핸드폰을 이용해서 서로의 거취를 확인할 수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체크리스트 형식으로 일과표를 작성하여 밤마다 서로 확인하고 ‘토큰’을 모아 보상하는 형식도 시도했는데,

 누적된 경험이 필요한 일이라 근래 들어서야 제대로 의미를 살려 잘 활용하고 있다.

 

뇌전증 발병 이후 초등학교 시절 한 차례 받았던 음악치료를 다시 시작했는데,

 2007년부터 2009년까지 한 선생님으로부터 음악치료를 받으며 피아노 레슨을 병행했다.

 상윤씨에게 피아노 연주는 특기일 뿐 아니라 학습과 재활치료이기도 하고 집중력 훈련이기 때문에

평생 꾸준히 레슨과 연습을 계속할 계획이다. 요즘 들어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자폐인 특유의 분절음의 연속성을 뛰어넘어 유려한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연주하는 아들을 보며

 ‘유연성’과 호흡을 연습하기에도 악기연주가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고등학교 때 부터는 상윤씨가 미래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준비하고자 노력했다.

고등학교 1학년 6월부터 시도해본 것은 평소에 아이가 흥미를 보이는 요리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당시에는 지원이 전혀 없어 전적으로 자비를 들여 아이와 함께 ‘가정요리’를 배울 학원을 수소문해 찾아내어

 6개월 동안 다녔다. 그쪽 기관에서도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지만 많이 양해하고 도와주셔서 감사히 진행할 수 있었다.

 이어서 조리사 과정에 도전했지만 필기시험이 아이에게는 너무 어려웠고

실기도 상윤씨가 하기에는 수준이 너무 높았다. 만에 하나 조리사 시험에 합격한다 해도 자격증을 활용하여 취업하기는

 불가능으로 다가와서 포기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간단한 요리 정도는 레시피를

보고 할 수준이 되어서 보람은 있었다. 혼자서 두 번씩 지하철을 갈아타고 요리학원을 오가며 밥도 사먹고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어 본 것이 오히려 사회적응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학교야. 널 믿고 싶다. 잘해주길 바래

 

고등학교 1학년 때 상윤씨는 몇몇 급우들에게 심하게 놀림과 폭행을 당했고

가뜩이나 사춘기를 맞아 힘들어 하던 아들의 불안은 커져갔다. 상윤씨는 장애인 등록을 하던 초등학교 4학년 시절

 두 달 동안 약물치료를 하다 중단한 경험이 있었다. 이후 일반학급에서 크고 작은 문제들이 있었지만

 2010년 미국행을 앞두고 다시 약물치료 시작하기까지 약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돌이켜 볼 때, 고등학교 입학하는 시점부터 강박이나 감정 조절에 도움이 되는 약을 복용하였더라면

아이가 조금 더 편하게 학교를 다닐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든다.

나의 경험을 교훈 삼아 사춘기를 앞둔 자폐자녀를 가진 다른 부모에게는 아이를 자세히 관찰해 보고

 의사선생님과 약물복용을 상의해 보라는 조언을 해주고 있다.

가끔씩 아들에게 악물 복용 전과 후를 비교해서 물어보면 약을 먹으면 마음이 많이 편해지고 흥분이 덜 되기 때문에

 약을 먹어야겠다는 말을 한다. 나를 포함해서 부모들은 ‘아이’를 보호하고 교육시킬 ‘대상’으로만 보고

 그들에게 나름대로의 의사결정권이 있다는 사실을 자꾸 잊어버린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2010년, 한 달 반 동안 아들과 함께 캘리포니아에 다녀온 이야기를 잠시 하고자 한다.

 학교 폭력과 현실감 없는 복지정책에 낙심하고, 학령기 이후 아이가 갈 만한 교육기관들을 찾던 중에

 2010년 5월부터 7월까지 캘리포니아 일대의 ‘사회전환 교육기관’과 ‘직업훈련기관’ 및 부모단체를 방문하고

 ‘필름캠프’에 다녀올 기회를 얻었다. 19년 동안 아이와 가정에 매어 변변한 여행 한 번 못 해 본 나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먹고 행동할 권리를 마음껏 누릴 아이, 두 사람 모두에게 미국행은

단순한 여행이나 체험이상의 많은 변화를 가져온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Taft College의 TIL(Transition to Independent Living)Program을 견학하고 학교 측과 교류를 시작하면서

 그들의 커리큘럼을 들여다보니 내 아이에게 필요한 전환의 기술이 무엇인지에 대해 실체적인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조차 제대로 된 전환교육 프로그램은 흔치 않았고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한 전망이 그리 밝지 않았다.

 부모단체나 비영리 단체들의 조력체계, 직업훈련기관과 보조 인력의 교육체계는 부러울 만큼 앞서있었지만

 실제 장애인들의 삶을 보면서 마냥 부러워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판 '뉴욕 타임즈'나 '허핑턴 포스트' 등의 매체에 실린 기사들을 보면 미국 역시 성인 자폐인들의 미래에 대해서는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고민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인다.

결론적으로 미국행에서 얻은 가장 핵심적 소득은 ‘아들의 자기결정권’에 대해 내가 비로소 깨친 일이었다.

 지적 능력이 조금 뒤처지는 자녀라는 이유로 그들에게 알리거나 의사를 묻지 않고 의사결정을 하는 일이

 얼마나 ‘인권’을 ‘유린’하는 것인지 미국 사회에서 장애인들의 의사가 존중되는 것을 보고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이번 투표에서도 먼저 아들을 챙겼고, 아들은 스스로 후보를 결정해 국민 한 사람으로써의 권리를 행사하였다.

 

미국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기반으로 차근차근히 아들의 미래를 다시 설계하기로 결심한 후

가장 먼저 전환교육기관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비자폐인들의 평균 취업연령이 대략 25살 이후인 것을 감안해 볼 때,

발달이 더딘 자폐인들에게 고교 졸업 후 충분히 사회전환과 직업에 대한 훈련과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숙생활보다 가족과 함께 지내기를 원하는 상윤씨의 의견을 반영하고

익숙한 지역사회 안에서 교육을 받는 쪽을 선택하여 고교 졸업 후 2~ 4년을 다닐 수 있는

 사회종합 복지관 내의 프로그램을 신청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국가의 정책이나 특수교육 전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현장에서 부모로써 느끼는 학령기의 교육과 미래설계에 대해 쓴 소리를 좀 하고자 한다.

 상윤씨의 경우, 초등학교에 이어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특수학급 담임과 긴밀하게 소통하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공교육을 받는 기간 내내 특수학급 담임교사의 역량에 따라 교육의 내용과 결과가 달라지는 상황이 계속되었고

 개별화교육 계획의 맥락이 이어지거나 누적되는 결과가 평가된 것은 없다.

특히 고등학교에서 지난 3년 동안 교육청과 교과부를 통하여

나름대로 장애학생들의 미래설계를 위한 새로운 시도에 참여하여

 직업과 ‘사회로의 전환’에 관련된 여러 가지 경험을 제공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성인기의 상윤씨의 미래를 설계하고 연착륙하는 일은 오롯이 부모의 몫이 되고 말았다.

 

상윤씨의 특수학급은 그마나 특수학급 선생님의 노력에 힘입어 고교 재학 동안 선생님의 도움으로

‘고용공단’에 구직등록을 하고 직업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 학급에 휠체어를 탄 학생까지 포함해서

 11명이 있다 보니 직업훈련이라 해야 수박 겉핥기식 체험에 지나지 않았다.

 ‘통합거점학교’에서 방과 후에 진행되는 ‘직업훈련’ 역시 지도자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올해 ‘통합거점학교’를 10 개교나 늘린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무조건 숫자만 늘리기보다 적은 수라도 제대로 계획하여 교육의 결과를 평가해 보고

방향을 수정 및 보완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근처 ‘서대문 장애인 복지관’에서 컴퓨터 교육을 받기도 하고

서부 장애인 복지관에서 진행되는 ‘사회 전환 프로그램’인 ‘열린 교실’에 참여도 했지만

직업과 연계성은 찾기 힘들었다. 상윤씨가 속한 특수학급 급우들은

졸업 후 (어쨌든 서류상으로는) 전원 취업과 진학 등의 진로가 결정되었는데, 매우 흔치 않은 일이라 한다.

 

가장 불합리하게 여겨졌던 것 두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하나는 로드맵이 없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그동안 애타게 찾아다녔던 기회들이 물밀듯 쏟아져

아이의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혹시나 꿈같은 일자리가 나타날 경우를 대비하여

 아들과 함께 고용공단에 가서 직능평가를 받으며 평가의 종류와 기준을 보니

그동안 내가 그토록 알고 싶어 하던, 고용을 위해 아이가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과

부모와 함께 준비해야 할 목표가 될 구체적 항목들이 그 직능평가 항목에 모두 들어있었다.

 만약 초등학교나 중학교시절부터 장애의 정도와 심각성에 따라 내 아이가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고

 어떤 종류의 직업을 갖는 것까지는 가능하다는 ‘로드맵’을 제시받았다면

그간의 고통과 고생은 훨씬 줄어들지 않았나 싶은 생각에 아쉬움이 컸다.

 현재 고 3에 집중된 평가 스케줄이나 직업체험의 기회들을 중학교부터 서서히 접할 수 있다면

장애당사자와 부모들이 불확실한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 우왕좌왕하며 치르는 헛수고를 대폭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 가지는 ‘개별화교육계획’의 취지가 그러하듯이 이 모든 과정이

각 학생의 능력을 고려하여 개별화되어 설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애인 취업박람회에도 참석해 봤지만 뇌전증(간질)을 동반한 자폐성 발달 장애인에게는

 돌아올 자리가 거의 없었으며, 대학의 자립학부는 수준이 너무 높았다.

이왕 나선 길에 주거 및 직업공동체도 몇 군데 다녀 보고 복지관에서 부모들을 위해 준비한 탐방 프로그램을 통해

 ‘보호 작업장’과 취업의 현장을 다녀보기도 했다. 기대가 크진 않았지만,

그 어디에도 내 아이를 위한 ‘맞춤 프로그램’은 없었다.

 

누가 보호해 주지?

 

가장 참담하고 화가 났던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2011년 8월, ‘서울시 교육청’과 ‘한국 장애인 고용 공단’이 공동출자해

 ‘희망 일자리- 커리어 점프’라는 프로그램을 내놓았고, 경험 삼아 신청을 했더니

75명의 대상 중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다. 사무행정 보조직, 기사보조와 도서관 사서 보조의 세 가지 직종을 두고

 3일의 취업준비 프로그램이 끝난 후 각 학교에 배치를 받아 3 주간, 직무지도원의 지도하에

 지원고용프로그램을 한 후, 학교 측과 고용계약을 체결이 되면 3 개월의 인턴쉽 단기채용을 한다는 계획이었다.

 취업의 기회가 왔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한 반면,

내가 거의 20 년에 거쳐 준비해 왔던 과정들이 과연 3일-3주-3개월의 단기에 속성으로 완성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간의 훈련과 교육의 힘에 더해 12년 동안 학교생활을 하면서 익힌 ‘일과성’과

자폐인 특유의 성실함으로 인해 주최 측의 기대 이상으로 훌륭히 수행해낸다는 중간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주변 고교의 장애학생을 위한 직업훈련시설의 허브인 ‘통합거점학교’에서 인턴을 하는 관계로

 국회의 ‘정책 발표회’에 사례 발표까지 시키면서 인턴 이후의 고용과 향후 커리어의 ‘점프’까지 보장하던 처음 조건은

 ‘통합거점학교’ 측에서 고용을 거부함으로 인해 자꾸 미루어졌다.

혼자서 기사보조 일을 할 수도 없고 따라다니며 지도할 인력이 없어 고용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일은 그들로서는 안타깝고 유감스러운 일인지 몰라도 나와 내 아이에게는 완벽한 사기극처럼 느껴졌다.

 취업을 하기 위해 미리 등록까지 마쳤던 ‘사회종합복지관’ 부설 ‘무지개 대학’에 입학을 포기했는데,

 일이 무산되고 나니 상윤씨를 포함해서 도합 열 명도 넘는 장애학생들이

 일 년 동안 갈 곳이 없어질 형편에 처해진 것이다. 화가 난 나는 서울시 교육청과 한국장애인 고용공단,

 고용노동청이며 서울시 의회까지 찾아다니며 노력을 했으나 구제할 길은 없었고

다행히 복지관 측에서 휴학 취소를 해줘서 입학을 할 수 있었다.

고용이 된 나머지 학생들도 고용계약과 일부 달라진 조건으로 근무하는 이해하기 힘든 일을 당하게 되었다.

교육청 사업 경험을 통해 아들과 나는 사회에 첫 발을 아주 씁쓸하게 디딜 수밖에 없었다.

비로소 장애자녀의 부모들이 공권력 앞에 머리를 깎고 오체투지를 하는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행착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아무런 책임도 지려 들지 않는 교육부를 비롯한 공직자들에 대한 불신은 앞으로도 씻기 어려울 듯하다.

내가 아무리 쫓아다니며 큰소리를 친들, 실적에만 연연하고

 상부에 보고하고 나면 ‘상황종료’인 관행 앞에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 정거장은 어디일까?

 

3월 5일 ‘무지개 대학’에 입학을 한 아들은 아주 힘겹게 적응을 하고 있다.

학습을 통해 배우는 것들은 큰 문제없이 습득해가지만 가장 크게 부딪히는 부분이 역시 사회성 부분이다.

 친구들의 농담을 이해하지 못 하고 자신을 놀리는 것으로 오해하기 일쑤라 흥분해서

수업에도 방해를 주기도 하고 장난의 대상이 되어도 적절히 방어를 하지 못 해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해서

 오히려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185cm에 85Kg이 넘는 거구가 기다란 양팔을 흥분해서 흔들어 대는 모습을

 ‘의사소통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위협적이라 모르는 사람들에게 오해를 살까 사뭇 두렵다.

 고교 3년 때부터 보이는 식탐으로 인하여 갑자기 늘어난 체중을 조절하는 일도 힘들다.

 성인의 몸을 지닌 ‘어른 아이’의 고충을 스스로 해결해 나가도록 옆에서 지켜보기도 하고,

 해결책을 찾아 상담을 하고 아이를 이해시키면서 설득하는 일은 내게도 무척 어렵고 힘들다.

 이제사 성인 자폐인들이 사회에서 하나씩 둘씩 자취를 감추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장애자녀를 집에 두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눈에 보이고 거리로 내보내면 말썽꾸러기로 변신하니,

 급여를 받기는커녕 수십 만 원을 내고서라도 ‘보호 작업장’으로 보내기를 원하는 데

그나마 법이 바뀌어 수익형으로 되는 바람에 중증 장애인들이 취업하기 더욱 힘들어진다.

상윤씨처럼 고기능인 자폐인도 사회성 문제로 인해 취업과 고용 유지가 힘들 수밖에 없음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지난 이십일 년 동안 이를 악물고 견디며 아이를 교육시키고 준비해 온 결과가 이렇게 무력해짐에

나의 의지에도 서서히 금이 가고 있음을 느낀다.

아직 자폐성 장애인의 중년과 노년에 대한 자료와 연구 결과들이 거의 없어

아이의 서른 살 이후를 예측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다음 정거장은 어딜까’ 궁금함만 더할 뿐이다.

 

최근에 장애인의 취업과 사회적응이 이토록 험난함을 미리 경험하고 예측하신 한 아버지께서

 장애인들에게 직업교육이 아닌 문화예술 영역을 통하여 새로운 길을 찾게 하는 ‘문화복지’를 개척하고 계셔서

 함께 일을 할 생각도 갖고 있다. 우리 부부도 아들과 함께 할 미래를 위해

 8년 전 시작했던 재활용 사업을 확대해 도시 근교로 나가 장애인도 쉽게 함께 할 수 있는

 ‘폐지 재활용 사업’을 시작할 계획을 갖고 추진 중이다.

 사회적, 법률적 제도도 조금씩 변화를 보이고 있으나 자녀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가야 하는 것은

부모들의 어깨일 뿐이라는 생각에 힘이 빠질 때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젊을 때 아이와 내가 함께 맞이할 미래의 틀을 잡아놓아야 하기에

오늘도 다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려 일어난다.

 

지금 나의 바람은 아이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봐 줄 수 있는 몇몇의 착한 사람들과 함께

 아이가 조금이라도 행복해 하며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일하고,

지역사회와 그리 멀지 않은 공기 좋은 곳에서 살다가

 미련 없이 아이와 헤어질 수 있을 기반을 닦았으면 하는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무슨 욕심을 그리 심하게 부리냐고......

욕심이 아니라 바랄만한 것을 꿈꾸고 실천하는 일이라고 강변해본다.